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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문화융성 여헌 장현광 선생 기념관"개관


이재영 기자 / youngl5566@naver.com입력 : 2014년 03월 14일
ⓒ CBN 뉴스
[이재영 기자]= 여헌(장현광(旅軒 張顯光:1554-1637)은 명종 9년(1554년) 1월 22일 인동현 인의방(현재 구미시 인동동)의 남산 본가에서 태어났다. 자는 덕회(德晦)이며 여헌(旅軒)은 그의 호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9세에 자형인 노수함(盧守諴)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10세에 이르러 효경(孝敬)의 도를 다할 수 있을 있을 정도로 학문이 성취되었다. 14세에 집안의 어른인 장순(張峋)에게 본격적으로 성리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18세에는 우주사업의 요체가 담긴 「우주요괄(宇宙要括)」을 지어 그의 학문적 지향과 목표를 분명히 하였다.

55세에는 그의 대표적 저술인 역학도설(易學圖說)을 찬술하기 시작하였으며, 68세에 「경위설(經緯說)」을 지었다. 70세(인조 원년)에 산림(山林)으로 징소(徵召)되어 성균관 사업(成均館司業)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다음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임금의 자문에 응하였다. 73세에는 임금에게 건극설(建極說)을 진술하였고, 74세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경상도호소사로서 의병을 규합하였다.

75세에 「만학요회(晩學要會)」, 77세에 「역괘총설(易卦總說)」, 78세에 「우주설(宇宙說)」, 79세에 「태극설(太極說)」을 지었으며, 80세에는 대궐에 벼락이 떨어지자 구언(求言)의 교지에 응하여 공구수성(恐懼修省)의 도를 아뢰었다.

81세에 「도서발휘(圖書發揮)」를 저술하였고, 84세에 남한산성이 함락되고 왕이 항복하자 입암으로 은거하여 「이철명(二鐵銘)」과 「좌벽제성(座壁題省)」을 지었으며, 동년 9월 7일 졸(卒)하였다.

여헌은 퇴계 이황 선생과 율곡 이이선생을 이어 17세기 조선유학을 선도한 대표적인 유학자이다. 그의 방대하고 치밀한 역학체계와 경위설에 입각한 이기론과 심성론 등은 유학이 추구하는 도덕적 이상사회의 실현을 위한 설계도이자 당대의 사회문제 극복을 위한 모색이었다.

여헌은 인륜도덕의 실천을 지향하며 인간과 자연, 그리고 우주를 아우르는 방대한 학문체계를 정립함으로써 조선유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으며, 나아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시대적 혼란 속에서 곤궁한 민생을 살피며 백성을 위한 정치개혁을 촉구한 실천적인 지식인으로서 당대를 대표하는 산림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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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여헌의 학문은 유학 전통에 대한 단순한 계승이나 편집단계를 뛰어넘은 것으로서 독자적인 면모가 뚜렷하였으며, 특히 역학에 뛰어나 그의 저작 중 최고로 평가받는 역학도설(易學圖說)은 당대 최고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그의 이기경위설(理氣經緯說)은 퇴계와 율곡의 논의를 뛰어넘는 학문적 성과로 평가받는다.

여헌은 23세에 재행(才行)이 특출한 인물로 조정에 천거된 것으로부터 만년인 82세에 의정부 우참찬에 이르기까지 그의 학덕과 인품으로 인해 많은 벼슬이 내려졌지만 실제로 관직생활에 종사한 기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외직으로는 선조 대에 두 번 지방관으로 부임한 것이 전부이며, 내직으로는 49세 때에 공조좌랑에 제수되어 교정청에서 잠시 주역 교정에 참여하였고 인조 2년과 인조 4년에도 관직이 제수되어 사은(謝恩)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여헌은 당대 영남을 대표하는 산림(山林)으로서 왕의 자문에 응하여 군주의 도덕적 완성을 촉구하였고, 조정의 화합과 사론의 통일을 강조하였으며, 정묘호란 이후에는 내수외양(內修外攘)에 기초한 국가질서 재편을 역설한 당대의 경세가였다.

특히 여헌은 시대를 뛰어넘어 공자의 교육정신을 본받아 일생의 대부분을 향촌에 은거하면서 강학 활동에 매진하였으며 짧은 관직생활에서도 고을의 자제들을 모아 강학한 교육자였다.

이재영 기자 / youngl5566@naver.com입력 : 2014년 03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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